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마구치 모모에 (문단 편집) ==== 사회 현상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RJLciB-vfT8, height=240)]}}} || || ''' [[한여름의 경험]] (ひと夏の経験) ''' || 1974년 당시 푸른 과실이 대히트해 인기 가수 반열에 오른 야마구치 모모에는 이후 내놓은 싱글 '[[https://www.youtube.com/watch?v=AiYW7U8DPvY|금지된 놀이]]', '[[https://www.youtube.com/watch?v=RzDe0Ljlo_U|봄바람의 장난]]'도 매상이 순조로웠다. 그러나 비슷한 노선을 했기 때문에 콘셉트의 변화를 줘야만 했다. 야마구치 모모에가 부르는 악곡은 데뷔곡인 '그럴 즈음'부터 쭉 작사 센게 카즈야, 작곡 토쿠라 슌이치 콤비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5번째 싱글도 센게 & 토쿠라의 콤비로 만들기로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토쿠라 슌이치(먼 훗날인 2021년 일본 문화청 장관에 부임하는 인물)와 센게 카즈야는 위기감을 안고 있었다. 이에 미야코와 센게는 야마구치 모모에의 5번째 싱글 작성에 즈음하여 면밀한 협의를 거쳐 더욱 과격한 노래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이 미팅 일주일 후 작곡가 토쿠라 슌이치에게, 센게 카즈야가 작사한 노래가 도착했다. 이 노래의 대표적인 가사가 바로 "당신에게 여자의 가장 중요한 것을 주었다."였다. 이것은 미야코 슌이치의 예상을 웃도는 과격한 가사였다. 하지만 토쿠라는 당황하면서도 야마구치 모모에의 가능성에 기대어 이 가사에 곡을 붙였다. 이 콤비는 야마구치 모모에의 새로운 도약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야마구치 모모에는 담담하게 노래를 불렀다. 무표정하고, 억양을 붙이지 않고, 오히려 던지기라도 하는 듯한 느낌으로, 15세의 야마구치 모모에가 '[[한여름의 경험]][* [[심야식당]] 코믹스에서 '리바운드의 여왕' 마유미가 불렀던 노래가 바로 이 노래다.][* 여담으로 [[AKB48]] 멤버들도 이 노래를 불렀다.](ひと夏の経験)'을 노래했다. 일명 '소녀성'을 표현한 노래. 검소한 의상, 청초한 얼굴 과격한 가사와의 갭. 이 노래의 반향은 푸른 열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완전히 일본 전국을 뒤집어 놓는다. 당시 음반업체 프로덕션에 [[항의]] 전화와 [[비난]] [[편지]]가 연일 무더기로 쏟아졌다. [[언론]]도 술렁였다. 일본의 [[학부모]] 단체에서는 이 노래들이 방송에 나오지 못하도록 단체활동까지 서슴지 않을 정도로 거세게 비난했다. 사실 본인도 이런 노래들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느꼈으며, 그래서인지 노래를 부를 때마다 종종 뻘쭘해했다. 그러나 이 곡은 대 히트해 한마디로 사회현상이 되어버렸다. 이 곡으로 모모에는 부동의 톱 스타가 되며 이 노래로 처음으로 [[NHK 홍백가합전]]에 출장한다. 프로듀서 사카이 마사토시, 작사 센가 카즈야, 작곡 토쿠라 슌이치의 콤비가 만들어 낸 야마구치 모모에의 노래는 연달아 히트 해 갔다. 그리고 5번째 싱글 〈[[한여름의 경험]]〉은 약 45만장의 판매량을 쏟아냈고 이 무렵의 야마구치 모모에는 더 이상 밀리지 않는 톱스타가 되었다. 모든 것이 프로덕션의 계산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이런 과격한 노선은 모모에 역시 거부감이 있었다. 그녀는 "어린 공포심과 방어적 본능이 나를 머뭇거리게 했다."고 자서전에 적었다. 또한 그녀는 "확실히 노래로서 보았을 때, 아슬아슬한 것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노래를 부름에 따라 내 안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여성의 신경이라고 하는 받아들이는 방법이 가능하게 되어 있었다."라고 자서전에 적기도 했다. 1974년 12월에는 야마구치 모모 최초의 발라드 곡 '[[https://www.youtube.com/watch?v=mEtlt0c0Mgo|겨울의 색(冬の色)]]'이 발매되며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하며 판매량도 52만장을 기록하며 모모에 커리어 역대 최고 판매량을 갱신하며 톱 가수로서 발돋움한다. >'''금지된 놀이, 한여름의 경험에 이어 나중에 푸른 [[성]] 노선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작품에는 전국의 [[PTA]]로부터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화제가 되고, 작품마다 표현력을 몸에 익혀 대히트를 연발한 결과, 야마구치 모모에는 톱 아이돌의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데뷔 초의 그녀는 왜 자신이 이렇게 자극적인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 당혹스러웠을지 모릅니다. 야마구치 모모에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 제안에 대해서도 「네, 알겠습니다」라고 조용히 받아 들여 결코 감정을 겉으로 나타내는 일은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감독이 세아미의 '숨기면 꽃'이라는 말을 배웠다고 하는데도 그 받아들이는 방법에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 >― 사카이 마사토시 (야마구치 모모에의 프로듀서)[[https://fujinkoron.jp/articles/-/3267|#]] 히트곡이 푸른 열매부터 금지된 놀이, 봄바람의 장난, [[한여름의 경험]]으로 이어진 히트곡 가운데 야마구치 모모에의 가창력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6집 싱글 작은 감상 때문이다. 1974년 9월 발표된 작은 감상은 당시로서는 꽤 참신한 록 사운드였지만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비트로 자연스럽게 불렀다. 그것이 레코딩의 스탭에게 이해되어, 단지 노래 부르는 것에의 익숙함이나 리듬의 좋은 것 뿐만이 아니라, 가창력 그 자체가 향상되고 있다고 재검토되었던 것이다. 음반 제작 디렉터였던 호리 프로의 가와세 야스오는 싱글 3개월 뒤 발매되는 앨범 <15세>를 위해 느린 편곡으로도 레코딩을 하고 있다. 그 무렵의 심정을 이것은 '록 밴드의 사운드다'라는 제목 아래 구체적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앨범 무렵, 모모에는 아직 미묘하게 어린 티가 남는 발성이었다. 그러나 노래를 시작한 「물론 할 수 없는 일이지만~」이나, 사비의 「왜 사랑받으면 안되는거야~」의 리듬에도, 모모에는 실로 기분좋은 듯 노래를 부르고 있다. 처음의 업 템포의 록 사운드라고 하는 어레인지였지만, 이런 리듬이라도 해내 버리는가 하는, 약간 놀라움을 가진 곡이었다." 그 당시의 아이돌이 2 종류의 다른 어레인지로 노래를 레코딩하는 등, 예산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카와세는 앨범·버전에 대해서, 이런 견해를 나타내고 있었다. "싱글 창법이 약간 돌진하게 부르는 업템포 록이라면 이쪽은 미묘하게 무겁게 리듬을 타는 헤비 록의 느낌이다. 이러한 차이로 요구되는 창법의 변화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표현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점점 모모에의 노래가 능숙해진 것이다." 앨범 버전의 작은 감상을 들어 보면 야마구치 모모에의 가창력이 향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4세에 데뷔한 야마구치 모모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과격한 주제와 가사를 가진 작품에 대해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스스로 생각함으로써 스태프에게 주어진 노래와 함께 성장해 왔다. 그리고 두 가지 '작은 감상'을 부르면서 그녀의 보컬에는 비트감 있는 록 사운드와 정감을 담은 어른스러운 세계가 모두 어울린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 노래에 대한 내용은 야마구치 모모에의 자서전에서도 기술되어 있다. >확실히 노래로서 보았을 경우 아슬아슬한 것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노래하는 것에 따라, 내 안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여성의 신경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아직 상상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여자의 미묘한 심리를 노래라는 매체를 통해 스스로 하나하나 확인해온 것 같다. >---- >― 자서전 "푸른 시절"에서[[http://www.tapthepop.net/song/88987|#]] 당시 희망대로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던 야마구치 모모에. 그러나 가수로서 인기가 폭발한 야마구치 모모에의 일과 [[학업]] 양립은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 [[사쿠라다 준코]] 등 다른 고교생 탤런트도 그랬지만, 모모에가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시간은 늦고, 그런데도 아침 8시 반에는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학교 수업이 끝나면 바로 노래 과외를 다닌다. 그리고, 밤에는 TV의 노래 프로그램의 녹화나 드라마의 촬영. 매일이 이런 스케줄이었다. 아무리 젊은 나이라도 엄청나게 살인적인 스케줄이었다. 그러한 식으로, 보통 고교생과는 전혀 다른 생활을 보내고 있던 모모에였지만, 그런데도 모모에는 학교에서 인기 탤런트라는 특별 취급을 받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힘들어도 아침엔 정시에 등교해 [[숙제]]도 내고 시험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이런 일이 있었다. 기본 부기 수업 중의 일이었다. "내 딸이 너의 팬이라서 말이야, [[사인]]을 원해" 수업 담당 교사가 수업 중에 모모에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리고 다음 기본 부기 시간. 또 같은 교사가 이번에는 모모에의 손목시계를 보며 "어, 너,예쁜 [[시계]]를 차고있네." 라고 말했다고 한다. 학교 동급생들과는 함께 놀 시간도 없어 그렇게 친해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를 특별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어른인 교사가 한 학생인 모모에에게 그런 말을 던지는 것이다. 모모에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분노]]를 느꼈고 모모에는 이후 기본 부기 수업을 졸업할 때까지 [[보이콧]]했다. 모모에의 성적업의 부기란에는 [[번외]]라고 주필로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모모에는 "일은 일, 학교는 학교"라는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다고 한다. 그래서 모모에는, 함께 노는 시간은 적어도, 자신을 특별 취급하지 않는 친구들을 진심으로 소중히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1974년]] [[10월]], 야마구치 모모에의 두 번째 장편 드라마 '붉은 미로'가 시작된다. 이것이 그 대박 시리즈가 된 붉은 시리즈의 첫 번째다. 이 시리즈는 그녀의 대표작이 된다. 우츠이 켄이 모모에의 부친역으로서 출연하고 있다. 지금은 '붉은 시리즈'라고 하면 야마구치 모모에의 작품이라는 이미지가 정착되어 있지만, 의외로, 이 '붉은 미로'에서는, 야마구치 모모에는, 주역이라는 입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붉은 미로에서의 야마구치 모모에의 존재감, 그리고 가수 야마구치 모모에의 인기로 인해 붉은 시리즈 2번째 작품인 붉은 의혹에서 야마구치 모모에가 주역으로 나오게 된다. 또, 야마구치 모모에와 [[마츠다 유사쿠]]가 공동 출연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귀중한 작품이다. 붉은 미로는 평균 시청률은 18.9%, 최고 시청률 22,7%를 기록한다. 붉은 미로가 방영을 시작한 [[1974년]] [[10월 25일]], 호리프로에서는 야마구치 모모에의 [[팬클럽]]지 '코끼리'를 창간한다.[* 이전부터 푸른 과실이나 한여름의 경험으로 부동의 인기를 얻은 이후였기에 야마구치 모모에의 팬클럽은 이미 개설되어 있었다.] 이름의 유래는 그녀가 좋아하는 동물이었던 '[[코끼리]]'다. 야마구치 모모에의 '코끼리' 사랑은 사실 당시 팬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왜냐하면, 모모에의 데뷔 싱글 '그럴 즈음'의 쟈켓이나, 팜플렛, 광고지등에는, 반드시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코끼리의 일러스트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동년 [[10월 25일]]에 창간 된 팬클럽 잡지 코끼리 NO.1에는, 그 당시 방영되고 있던 텔레비전 드라마 '붉은 미로'의 특집이나, 발매 예정의 레코드 리스트, 모모에의 최신 스케줄 등 팬들이 궁금해 한 정보가 가득했다. 그 후로도, 정기적으로 '코끼리'는 간행되어 모모에 팬을 향해서 여러가지 정보가 전달되었다. 덧붙여 이 팬클럽 잡지는 야마구치 모모에의 은퇴와 함께 폐간이 되었지만, 모모에의 팬클럽 그 자체는 해체라고 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지 않다. 야마구치 모모에의 은퇴의 시점에서 팬클럽의 회원이었던 사람들은 '영원히 회원'으로서 호리프로의 명부에 게재된 채로, 그 후에도 야마구치 모모에 관련의 신상품의 안내등이 보내지게 되었다. 실제로, 야마구치 모모에 은퇴 후 2년 정도는 영화의 비디오 발매 정보 등이 팬클럽의 회원에 전해지고 있엇다. [[1974년]]은 야마구치 모모에와 사쿠라다 준코는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를 양분했다. 이 둘은 전국적인 스타가 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열광적인 세대가 바로 [[대학생]]이었다. 그중에서 유명한 것이 [[도쿄대학]]과 [[와세다대학]]의 투쟁이다. 우선은 와세다 대학이, 먼저 인기를 얻고 있던 사쿠라다 준코를 이미지 걸로 했다. 그리고 와세다의 학생들 사이에서 '사쿠라다 준코를 지키는 모임'과 같은 마음대로 사쿠라다 준코를 응원하는 모임이 생겨났다. 이것에 대항한 것이 도쿄대학이었다. 이번에는 도쿄대학이, 사쿠라다 준코의 대항마인 야마구치 모모에를 이미지 걸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도쿄대 학생들은 야마구치 모모에를 지키는 모임을 만들어 모모에를 응원했다. 도쿄대학에서는 [[만담]] 연구회가 '야마구치 모모에와 친구가 되는 모임'을 만들었다. 물론 이 모임에 들어갔다고 해서 정말 야마구치 모모에와 친구가 될 수 있을 리는 없다. 그래도 이 조직은 점점 커져만 갔다. 심지어 이 싸움에 [[게이오기주쿠대학]] 등 다른 대학들의 참전도 시작됐다. 오히려, 이번에는 와세다대학에 '야마구치 모모에를 도쿄대학으로부터 되찾는 모임'이 발족했던 것이다. 전혀 의미를 알 수 없는 집단이었지만 그래도 학생들은 혈안이 되어 각 모임에서 열띤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1974년]] [[9월]] 야마구치 모모에의 첫 주연 영화가 발표되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 원작의 이즈의 무희다. 이 작품은 [[1966년]]에 [[요시나가 사유리]]의 주연으로 영화화 되었는데, 그 때의 감독인 니시카와 카츠미가, 모모에의 작품으로도 연출을 하게 되었다. 이즈의 무희는 지금까지 무려 5차례나 영화화됐다. 주연 여배우의 면면이 화려하다. 다나카 키누요, [[미소라 히바리]], 와니부치 하루코, 요시나가 사유리, 나이토 요코. 이즈의 무희에 주연했던 여배우들은 그 후 모두 유명 여배우로 성공하고 있다. 거기에 신인인 야마구치 모모에가 발탁됐고 호리프로는 가수로서 브레이크한 야마구치 모모에를 여배우로서도 본격적으로 홍보할 결심이었던 것이다. 야마구치 모모에를 주연으로 시작한 이 기획의 가장 중요한 결정사항은 모모에의 상대역이었다. 영화제작사인 [[도호]]는 당시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폭발하고 있던 야마구치 모모에의 인기에 말려드는 형식으로 모모에의 상대역 일반모집을 했다. 젊은이들은 '나야말로!'라며 모두 모집에 응모했다. 서면으로 응모한 남자의 수는 무려 1만 5천명. 서류전형을 통과하고 면접을 본 남자들은 4천명. 일찍이 유례없는 대규모 [[오디션]]이었다. 심지어 이 오디션은 아무나 응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응모할 수 있는 남성의 조건은 3가지 ①나이 17세부터 23세까지 ② 신장 170cm 이상 ③ 인상은 상쾌한 느낌으로서 [[다이쇼 시대]]의 고교생 분위기의 남성. 그리고 최종 전형에 통과한 남성은 23명. 그중에는 '야마구치 모모에를 지키는 모임' 등에서 야마구치 모모에에게 미쳐가고 있는 도쿄대 학생도 있었다. 그 밖에도 13명의 대학생이 있었다. 당시 [[언론]]들은 '드디어 대학생이 진짜 야마구치 모모에에게 다가간다!'라고 거기에 관심을 집중했지만 결국 상대역은 [[글리코]] CF에서 공동 출연한 [[미우라 토모카즈]]로 결정됐다. 결국 모모에의 팬들은 영화 이슈 만들기에만 이용됐을 뿐이다. 그 대신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무라. 토모카즈 라는, 이후의 일본 영화사를 논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골든 콤비가 이즈의 무희로 탄생되었다. (하지만 아직 이 무렵의 모모에와 토모카즈를 세간에서는 골든 콤비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즈의 무희'는 대박이 났다. 흥행 수입 8억 3,000만엔. 당시 흥행 3위를 기록했다. 그렇게 첫 주연작을 히트시킨 야마구치 모모에는 배우로서도 한걸음 내딛었다. [[1975년]] 당대의 스타로 등극한 야마구치 모모에는 [[설날]]부터 TV에서 그녀를 보지 못한 날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의 톱스타를 기용하던 기업 후지 컬러는 이 해 정월판부터 광고에 야마구치 모모에를 기용했다. 1탄은 그 유명한 '모모에를 지키자'편이다. 설에만 있었던 특별 버전이었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는 명작이다. 그 후로도 가요프로그램, TV드라마 등 야마구치 모모에는 TV에 계속 출연했다. 대여배우에의 등용문이라고 불리던 이즈의 무희에서 훌륭하게 주연을 연기한 야마구치 모모에에게 2번째의 영화 주연이 정해졌다. 유명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파도소리가 그것이다. 이 영화도 당시 아오야마 쿄코, 요시나가 사유리, 오노사토 미도리 등 유명 여배우에 의해 영화로 제작됐다. 미시마 유키오는 살아 있을적에 촬영지를 가미시마로 만드는 것을 영화화의 조건으로 삼았다. 그 때문에, 모모에가 주연한 파도소리도 당연히, 카미시마에서 촬영되게 되었다. 당시 유명 작품들에 기용으로 모모에도 부담이 컸지만 미우라 토모카즈도 부담이 컸다. 이즈의 무희에서 야마구치 모모에의 상대역이 되어 처음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됐기 때문이다. 이미 톱스타로 올라선 모모에와 달리 이때의 토모카즈는 어디까지나 모모에의 상대역으로서 포지션에 불과했다. 파도소리는 그 해 흥행 6위를 거두었고 모모에는 착실하게 배우 커리어를 쌓는다. 한편, 1975년 꽃의 중3 트리오는 꽃의 고2 트리오로 바뀌었다. 중학교 3학년생 3명의 아이돌 가수의 등장은 센세이셔널했지만, 이들의 인기는 멈출 줄 몰랐다. 각각의 활동도 물론 주목받았지만, 3명이 함께 하는 가요 프로그램도 많이 출연해서, 이 때의 시청률은 매회 폭발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3명이 함께 영화 공연은 없었다. 영화 촬영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세 사람의 일정을 조율하기 어려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1975년 세명이 공동 출연한 8월 '꽃의 고2 트리오 첫사랑 시절'이 개봉한다. 야마구치 모모에, 사쿠라다 준코, [[모리 마사코]]의 3인방을 주연으로 하는 [[청춘]] 영화이다. 공개 전 예상대로 영화는 대박이 났다. 흥행 수입 5억 9600만엔. 그 해 흥행 4위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dP8p8CMGXyU, height=240)]}}} || 당시 화제를 몰고 다녔던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 콤비는 '러브 러브 쇼'에 출연하기도 했는데 내용은 프로그램이 마음대로 선출한 남녀의 연예인을 출연시켜, 그대로 커플[* 당시는 아베크라고 불렸다]로 발전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프로그램이 계기가 돼 실제 결혼까지 한 커플은 무려 8쌍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결혼 활동 프로그램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던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에 당시 CF나 영화에서의 공동 출연으로 화제가 됐고, 이미 '골든 커플'로 알려진 모모에와 토모카즈가 출연했다. 위의 영상이 프로그램 내용 중 일부다. 당시 토모카즈와 모모에는 사귀지 않고 있었지만 요즘으로 치면 [[망붕]]이라고 불릴 일을 방송국에서 판을 깔아준 것이다. 또한 이 해에 야마구치 모모에는 '모모에짱 축제'를 열어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은퇴할 때까지 5회, 신쥬쿠 코마 극장에서 개최된 콘서트다. [[여름방학]] 기간 중 개최되었고 이 해 8월부터 시작됐다. 첫회인 이 축제의 구성은 앞부분 1부가 검은 천사라는 제목의 록 뮤지컬이다. 무려 야마구치 모모에가 리젠트에 검정색 가죽 자켓이라고 하는 스타일로 열연했다. 후반의 제2부에서는 "노래다!! 축제다!! 모모에"라는 버라이어티 쇼를 열었다. TV 가요프로그램이나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그녀의 매력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팬들에게는 특별한 [[이벤트]]였다. 그리고 그녀는 결과적으로 1980년에 은퇴할 때까지, 이 '모모에짱 축제'를 계속하게 된다. '모모에짱 축제'는 그녀를 전국구 스타로 만드는데 큰 영향을 줬다. 당시 이 콘서트에는 어린 아이뿐만 아니라 나이 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폭 넓은 세대가 이 콘서트를 보러 오게 된다. 모모에짱 축제는 당시 젊은 세대에게만 인기였던 아이돌 야마구치 모모에의 인지도를 크게 올리는 계기가 된다. >모모에씨의 스테이지는 단순한 젊은 인기 가수의 무대라고 하는 들뜬 분위기가 아니고, 연극이든 온스테이지든 본격적인 격조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리허설에 입회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머리가 좋고, 무엇보다 쿨(냉정)함을 잃지 않는 '어른의 모습'에 놀랐습니다. 무대의 진행을 담당하는 것은 무대 감독입니다만, 모모에씨는 사전에 제대로 대본 암기하고 있고, 무대의 능숙(객석에서 보고 오른쪽)이나 서투름(객석에서 보고 왼쪽)에서의 움직임이나, 상대역과의 대응에 정확한 판단을 나타내고 있던 것을 목격했을 때는 솔직히, 놀랐습니다. >---- >― 와타나베 키요시 지음, 고스게 히로시·듣는 사람 『「신주쿠 팽이」 단장들의 무대 뒤』[[https://tokyo.whatsin.jp/541443|#]] 당시 모모에는 여배우로서도 한층 더 비약을 보이게 된다. 1975년 이 해 10월에 바로 붉은 시리즈의 두번째 드라마 '붉은 의혹'의 출연하게 된다. 1편에서는 조연이었지만 이 드라마부터 [[주연]]을 맡게 된다. 시리즈 제1탄의 붉은 미로에서는 주역이라는 입장이 아니었던 야마구치 모모에였지만, 이번 붉은 의혹에서는 뚜렷한 야마구치 모모에 주연이라는 자리매김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붉은 의혹의 평균 시청률이 23.4%, 최고 시청률 30.4%라는 경이적인 숫자를 냄으로 1탄을 뛰어 넘어 대히트를 기록해 붉은 시리즈는 완전 야마구치 모모에의 작품이 되었다. 붉은 미로에 이어 다시 우츠이 켄이 모모에의 부친역이 되어, 이것으로, 야마구치 모모에와 우츠이 켄의 이른바 골든 부녀 등도 정착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모모에의 연인 역으로 미우라 토모카즈가 또다시 발탁됐다. 붉은 미로에는 출연하지 않았던 토모카즈였지만, CM, 영화에서 연달아 모모에와 공동 출연해, 이미 세간으로부터 인정받은 모모에와 토모카즈를 붉은 시리즈의 간판으로 만든다는 자연의 흐름이 되었다. 이 드라마는 매번 높은 시청률을 얻으면서 드라마가 시작되는 시간대에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TV 앞에 몰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TBS계의 텔레비전 드라마 '붉은 의혹'에서 [[백혈병]]에 걸린 히로인을 연기한 야머구치 모모에는 일본 전국으로부터 '모모에짱, 죽지 마'라고 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시청자를 그 세계로 끌어 들였다. 당시 야마구치 모모에의 기세는 바다 건너까지 영향을 끼쳐 [[중국]]에서도 드라마가 대히트했다. 당시에 야마구치 모모에는 중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일본 여배우로 등극한 것이다.[* 남자 배우로는 [[타카쿠라 켄]]이 중국에서 인기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4_PhyXBHVhk, height=240)]}}} || || '''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붉은 의혹 ''' || 1975년에는 싱글 '[[https://www.youtube.com/watch?v=QNAmnpgb4g4|호수의 결심]]'[* 인트로에 '운명을 믿나요'가 들어간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FLaC2L3ZMzM|여름을 여는 청춘]], [[https://www.youtube.com/watch?v=2Vl09CTx9t0|작은 욕망]]/[[https://www.youtube.com/watch?v=4_PhyXBHVhk|고마워요 당신]], [[https://www.youtube.com/watch?v=P6j-6V_ZujU|하얀 약속]]/[[https://www.youtube.com/watch?v=Kr50l04td0k|산비둘기]]를 발매한다. 지난 해만큼 임팩트있는 노래들은 없지만 가수로서 안정기를 보낸 해라고 볼 수 있다. 여름을 여는 청춘으로 2회 연속 홍백가합전에 출장하게 된다. 고마워요 당신은 그녀의 주연 드라마 붉은 의혹에 주제가였으며[* 2019년 장난 유타로와 남편 토모카즈가 방송에서 부르기도 했다.] 산비둘기는 그녀의 영화 절창의 테마곡, 하얀 약속은 붉은 의혹에 ost이기도 했다. 또한 12월에는 미우라 토모카즈와 공동 출연한 영화 '절창'이 개봉. 이 절창은 과거에 닛카츠로 아사오카 루리코·코바야시 아사히, 이즈미 마사코·후나키 카즈오의 콤비로 영화화되고 있다. 두 작품 모두 대박이 났다. 모모에·토모카즈가 이전까지의 영화 '이즈의 무희', '파도소리'는 모두 [[리메이크]]며 게다가 모두 대여배우, 명배우가 주연을 맡아 영화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곤 했다. 야마구치 모모에는 그러한 부담감을 떨치고 모든 영화를 흥행시켰고 절창도 흥행 수입은 9억엔을 거두며 흥행 대박을 거둔다. 1975년은 야마구치 모모에에게 있어서 비약의 해였다. 그와 동시에 모모에 팬들의 활동도 확대되어 갔다.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이 팬클럽 [[잡지]]들의 발행이다. 인터넷이 흔한 지금은 감을 못 잡을지 모르지만, 책자로 배달되는 팬클럽지는 당시 연예인 팬들에게는 보물처럼 소중했던 것이다. 당시의 아이돌 중에서도 두드러지게 인기가 있던 야마구치 모모에에게는 여러 팬클럽 잡지가 발행되고 있었다. 1976년 1월 17일, 야마구치 모모에는 17번째 생일을 맞았다. 직업상 있었지만 모모에는 도쿄 [[아카사카]]에 있는 요정 시골집에서 스탭에게 생일을 축하받았다. 17살이라고는 하지만 연예계에 들어온 지 벌써 4번째 생일이었다. 톱스타로서의 자각도 충분히 갖춘 야마구치 모모에의 정신연령은 실제 그것을 훨씬 웃돌았을 것이다. 바쁜 일과 양립하면서 다니던 히노데 여자고등학교에서도 벌써 최상급생이 된다. 일하는 틈틈이 학교에 다니다가 학교 앞에 마중 나오는 사무실의 차를 타고 다시 사무실로 직행. 그런 생활을 2년 넘게 지속하고 있는 모모에였다. 당시 모모에는 '나만 남들과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굉장히 거부감이 생겨'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본래라면 친한 친구들에게 천천히 생일을 축하받는 나이이니 그런 고민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 또한 이 해 야마구치 모모에는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수학여행]]에도 참가하게 된다. 그 때의 모습은, 팬 클럽이 발행하는 '야마구치 모모에 신문'에도 사진을 첨부해 게재되고 있다. 당시 야마구치 모모에는 가수로서뿐 아니라 영화배우로서도 부동의 톱스타였다. 영화 세 작품을 모두 히트시킨 후 '야마구치 모모에가 주연 하면 대박이 난다'는 것은 당시의 영화계의 상식이 되었다. 도호 영화가 모모에 주연의 신작을 기획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76년 4월 야마구치 모모에의 영화 에덴의 바다가 개봉한다. 상대역은 계속 맡았던 미우라 토모카즈가 아닌 난조 유타카. 미우라가 아닌 난조가 나와 사람들은 항의를 했고 영화는 이전과 달리 흥행하지 못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title-752.jpg|width=100%]]}}} || || ''' 당대 최고의 인기 배우 중 한 명이었던 야마구치 모모에 [br] 영화면 영화, 드라마면 드라마 모두 히트시켰다 ''' || 1976년 4월, 야마구치 모모에 주연의 TBS 드라마 붉은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 '붉은 운명'이 시작됐다. 바로 전작품인 붉은 의혹의 히트 이후 이제 붉은 시리즈는 야마구치 모모에가 중심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는 첫 신호탄이 될 작품이었다. 때문에 붉은 시리즈 제3탄 역시 야마구치 모모에가 주연으로 발탁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 상대역은 미우라 토모카즈가 아닌 무명의 신인 배우 난죠 유타카였다. 미우라 토모카즈가 참여하지 않은 영화 '에덴의 바다'로 실망한 팬들에게 난죠 유타카는 그리 만족할만한 상대역은 아니었지만 의외로 에덴의 바다와는 달리 붉은 운명은 호조를 보였다. 우려와는 달리 평균 시청률 23.6%를 기록해 붉은 의혹에 버금가는 대박 드라마가 된 것이다. 평균 시청률은 전작보다 더 잘나왔다. 아무래도 텔레비전 드라마는 영화에 비해 접근성이 높은 점도 이유겠지만 무엇보다 드라마의 스토리나 배우들의 연기, 연출 등이 보는 사람을 매료시켰을 것이다. 이 덕에 앞으로 찍게될 드라마나 영화의 상대역이 미우라 토모카즈가 아닌 난죠 유타카가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다음 야마구치 모모에 주연 영화 '[[바람이 분다]]'의 상대역은 미우라 토모카즈로 결정되었다. 바람이 분다는 7월 31일에 개봉했고 영화는 예상대로 대박을 쳐 7억 9,200만엔이라는 엄청난 배급 수입을 올렸다. 같은 해 흥행 수입 순위 6위라는 성적이다. 1976년 11월에는 붉은 시리즈의 네번째 작품 '붉은 충격'이 방영된다. 역시나 상대역은 미우라 토모카즈. 전작 붉은 운명의 상대역이 난조 유타카였던 것에 팬의 항의가 많아서였는지 결국에는 미우라 토모카즈가 다시 상대역으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야마구치 모모에의 아버지 역으로 우츠이 켄이 아닌 나카조 시즈오가 발탁되었다. 그녀의 아버지 역은 거의 우츠이 켄이 맡아왔으나 빡빡한 스케줄로 건강이 악화된 탓인지 반년간의 휴양을 취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버지 역이 아닌 의사 역으로 초기에 잠깐 나온다. 이 드라마도 대박을 치게 되는데 평균 시청률 27.0%, 최고 시청률 32.6%를 기록했다. 붉은 시리즈 최고 시청률. 연기만 했다 하면 승승장구하는 그녀에게 모 평론가는 "연예인으로서 모모에가 가진 진정한 재능은 노래가 아니라 연기다."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